책과 활력

생활속 리뷰 2010. 3. 7. 23:05

최근 여러가지로 고민이 많은 시기에 관심이 가게 된 것은 책이다. 특히 요즘엔 '돈'에 대한 책에 관심이 많이간다. 그렇다고 재태크나 뭐 부자이야기 이런책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돈의 흐름, 정책과 돈, 산업과 광고 등 지금 사회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는 것에 대한 관심이 많이 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최근 읽은 책들은 광고에 대한 이야기, 기업에 대한 이야기, 불황, 정책, 예산에 대한 이야기 등이다. 이런 책들을 읽으며 매번 새로운 것을 배운다. 내가 책을 읽기전에 어떠한 현상에 대해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다면, 책을 읽고 나서는 보다 인사이트를 가지게 된달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람을 만날 때 나날이 새로운 사람이 있는 반면 몇 달 몇 년이 지나도 똑 같은 이야기만 하는 사람도 있다. 그 차이는 사람의 배움의 차이일 것이고 그 배움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결국 독서의 차이가 아닐까

최근 여러가지로 고민이 많은 시기인데 책읽기를 통해 조금 더 성숙(?)해져 보려한다. 게다가 나에겐 '안식휴가'라는 것도 아직 남아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보름동안 책에만 빠져 살 수도 있지 않을까.

한동안 힘없는 생활이었는데 힘좀 받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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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부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누구도 공부하는 것을 즐기진 않겠지만..

고교시절 나는 '이과'로 진학을 했다. 사실 고교1학년때 '이과'나 '문과'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없었고 그냥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그랬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의 한 학년 학급은 총 12학급이었는데, 남자학교의 경우 보통 문과가 4학급, 이과가 8학급이었다. 그리고 이를 바꾸는 건 쉽지 않기에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진학할 때 담임 선생님들이 대략 그 학생의 성적을 보고 분류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부모님도 내가 이과로 진학하는 것을 원했고 담임선생님도 이과를 추천했다. 이유는 단지 다른 과목에 비해 수학 과목이 점수가 높다는 이유와, 이과가 취업이 잘 된다는 이유였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 당시에는 나도 고민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고교시절 내가 진학을 희망했던 대학의 학과는 '원예학과'였고 원예학과 역시 이과에 소속되어 있었기에 나도 이과로 진학을 했다.

고교시절나는 보통의 친구들과 비슷했는데, 한가지 특징이 있다면 헤비메탈 음악에 심취했다는 정도.
그 시절 한달 용돈이 3만원 정도였는데, 용돈을 받자마자 핫뮤직 1권과 원하는 메탈 CD 혹은 Tape을 한장 구입했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부산의 남포동에 작은 백화점이 하나 있었는데.. 오픈 기념으로 매주 화요일 저녁에 락 밴드드을 초청하여 짧은 공연을 가졌는데 나는 이 공연장에 가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매주 화요일 저녁마다 '야자'를 땡땡이 쳤었다.

그 당시 공연을 봤던 밴드들은 블랙홀, 이스크라, 메이데이 등의 공연을 봤었고 미친듯이 헤드뱅잉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기도 하지만.. ㅋ

그리고 그 당시 기억이 나는 앨범은 이스크라 1집, 당시 미성년자 구입불가였는데 동네 레코드점 아저씨가 개의치 않고 판매를 했다. 특별히 미성년자에게 구입불가할 이유는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이스크라의 앨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노래는 '적과 친구' 입시 경쟁 등을 가슴아프게 노래한 것인데.. 나에겐 반골기질이 있는지 이 곡에 심취한 후부터 공부하는 것이 더 싫었다.
그러나 대학진학에 대한 포기까지 할 정도로 용기있진 않아서 수능시험을 보고 대학진학을 하게된다.

대학진학을 할 때 난 2가지를 원했는데 하나는 서울로 가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원예학과로 진학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부모님은 둘 다를 반대하셨고 나는 타협하여 우선 서울로 가는 것에 목표를 두고 서울소재의 대학 그리고 '컴퓨터학부'에 진학을 했다.

난 당연히 컴퓨터에 별 관심이 없어서, 컴퓨터학부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그러다보니 학업보다는 동아리나 학생회 혹은 기타활동에 더 많은 열정을 쏟아부었던 기억이다.
또 나는 용기가 부족하여 전과도 못했고 원하는 학과가 있는 학교로 편입 등도 생각을 못했다. 물론 대학성적이 낮았으니 조건도 안되었고...

그러나 난 대학시절 4년동안 무수히 많은 것들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학과공부에는 소홀했지만 동아리 활동 등에는 그 누구보다 적극적이었고 이 과정에서 여러가지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리고 나서 졸업을 하게된 2006년 대학 전공과는 전혀 관계없는 분야로 취업을 하게되었다. 이 분야는 대학시절 다양한 활동을 한 경험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으며 더 흥미롭고 재미가 있었다. 이렇게 대학 학과 친구들과는 다른 길로 취업하여 4년동안 직장생활을 하다보니 나에게 문득(?) 학업에 대한 열정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다.

직업과 관련한 분야를 공부해보고 싶었고 이렇게 공부하면 직무에도 도움이 되고 스스로도 더 전문성있게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야간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고 원서를 넣고 면접을 보고 최종 합격까지 했다.
이 때가 정말 기분 좋았던 시간이 아니었나 한다. 스스로 공부하고자 한 때는 이 때가 처음이었고 합격했다는 통보에는 대학 합격보다 훨씬 기뻤다. 그리고 어렵게 등록금을 마련하여 최종 등록을 하였다.
하지만, 몇가지 문제가 생겨 대학원 진학을 포기해야 했고 나는 대학원에 입학포기각서를 제출했다. 이 날 처럼 공허감이 많았던 날도 별로 없었던 기억이다...

만약 내가 조금 더 용기가 있었다면, 2일전인 3월 2일부터 들뜬 마음으로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나에겐 그 용기가 부족했다.

1999년 대학을 입학했고 벌써 11년이 지났다. 고교시절 부터 대학시절까지 그렇게 하기 싫었던 공부가 지금은 하고싶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가 보다. 몇 년 더 지나면 기회가 오지 않을까 싶다는... 그 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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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학 혹은 경제학 강연이라하면 왠지 무겁게 느껴진다. 무겁게 느껴지는 것 뿐 아니라 보통의 경우 많은 관중을을 사로잡기가 쉽지않다. 사실 내 경험도 그랬다. (물론 이는 강연자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무지에서 오는 결과이다 ^^; )

'인문학 경제학은 어렵고 지루하다'라는 편견을 깬 강연이 있었으니 바로 어제 제주에서 있었던 신영복 선생님의 강연이었다. 금요일 저녁 연초라 많은 약속들이 있을텐데도 불구하고 내가보기에 대략 300명을 훌쩍 넘는 인원들이 모여들었다. 뿐만 아니라 1만원이라는 참가비가 있었음데도 불구하고 강연장소의 모든 좌석은 물론 보조의자와 계단 사이 사이와 복도까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그곳에 그렇게 모인다고 해서 특별한 상품이 있는것도 아니지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바로 '길'을 찾기 위해서가 아닌가 한다.

사전행사로 몇가지 이벤트가 진행되고 난 후 신영복 선생님께서 무대로 오르셨다. 올해 70이시지만, 누구보다도 젊어보이셨다.


어제 강연의 주제는 '숲으로 가는 길' 선생님께서는 숲으로 가는 길을 우리 머리에서 가슴을 지나 발로 가는 아주 먼 여정에 비유를 해주셨다. 이 때 그린 사람의 모습 (머리와 가슴과 발)을 보는 청중은 선생님의 위트있는 멘트와 함께 사람의 모습에 곳곳에서 빵빵 터졌다.

선생님께서 오랜시간동안 감옥에 계시면서 스스로도 경험했던 이야기들을 해주실때 아 나도 선생님의 말씀처럼 지금까지 상대방을 대상화하고 타자화하고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하면서 생각해왔던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이렇게 좋은 말씀을 해주시는 중간 중간에 선생님께서의 감옥에서 만났던 한 청년의 이야기나 감옥에서 '떡신사'였던 사연들을 이야기 주실 때에는 빵빵 터진 것을 넘어 300여 관중이 들썩일 정도가 아니었나 한다.

선생님께서는 강연을 마치면서 강연의 주제인 '숲으로 가는 길'의 조건에 대해 말씀주셨는데.

첫째는 곧고 빠른 도로가 아닌 길을 걸어야 한다는 말씀이셨다. 경제성만 중요시 하는 큰 도로가 아닌 길을 가며 사람을 만나고 함께할 수 있는 길을 말씀하셨다.
두번째는 자부심,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고 떳떳해야 큰 힘이 생긴다는 말씀, 세번째는 '자유'에 대해 말씀주셨는데 이 때 네덜란드의 동화작가 이야기를 소개해주셨다.

 어느 버섯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지나가며 그 버섯을 독버섯이라고 하여 그 버섯이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는데 우리가 사물을 바라볼때에도 식탁의 논리로 보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되돌아보라는 말씀을 주셨다.

식탁의 논리.. 정말 생각해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냐 당장 나에게 어떤 이익이 오냐 나에게 불이익은 없는가 위주로만 생각해온것은 아닌가 싶다...

신영복 선생님의 강연이 끝다고 더숲트리오(성공회대 교수님들의 노래패?) 공연도 있었는데, 더숲트리오 교수님들의 멘트에서도 곳곳에서 빵빵터졌다. 신영복 선생님의 입담을 때론 뛰어넘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ㅎㅎ


이어 공연이 끝나고나서는 신영복 선생님께서 다시 무대에 오르시고, 깜짝 이벤트로 방송인 김제동씨가 나와 질의응답 시간의 사회를 봤는데 처음으로 본 김제동. 역시 김제동이였다.

구수한 입담과 재치있는 위트, 최근 방송에서 볼 수 없는 그 였기에 특히 더 구수하지 않았나 싶다.

가장 아쉬웠던건 내가 아이폰이 없어서 현장에서 사진을 찍어 바로 트윗 등에 올릴수 없었다는 것 ㅠ.ㅠ
어서 안드로이드가 내 손에 오길 기다릴 뿐이다 ;;


어제 강연을 들으면서 역시 좋은 말씀은 자주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생활을 하며 사회생활을 하며 때때로 너무 많은 것들을 잊고 살아가는 것 같다.
나또한 너무 작은것에 일희일비 하고 타인을 대상화 하며 살아온 듯 하다.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P.S
신영복 선생님께서는 전국 순회 강연을 하신다고 하니 지역에서 강연이 있으면 꼭 가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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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고라에서 안타까운 사연의 글을 하나 접했습니다.
올해 20살인 한 여대생이 용돈을 마련하기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한 인쇄소에서 파쇄기에 손가락이 빨려들어가 손가락 4개를 잃은 것입니다.

이 사연은 손가락을 잃은 여대생을 동생으로 둔 언니 혹은 오빠가 작성한 글로 추정됩니다. (동생이라고 칭했으니...)

저는 이 글을 읽고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에 이 사연을 트윗을 했습니다. 혹시 트윗을 하면 법률전문가나 노무사 혹은 도움을 주실수 있는 분들이 있으리라 생각을 했지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RT가 있었습니다. 이 중에는 보건복지부 트윗도 있었고 변호사도 있었고 노무 관련 일을 하시는 분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법률적으론 모르지만 의학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다는 분도 계셨죠.

< 제 트윗에 올라온 RT 들 >

이렇게 짧은 시간에 올라오는 리트윗 글들을 보면서 아 이러다가 해당 사연을 가지신 분이 정말 법률적인 도움을 받아 동생의 치료 혹은 보상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글쓴이가 후기를 올릴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게 되더군요.

그리고 어떤이는 게시물의 댓글에서 직접 도움을 주겠다. 금전적인 도움을 주겠다 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포털의 서비스 그리고 웹 서비스가 이렇게 집단지성+집단의 도움으로 해당 사연을 가진 분에게 법률 정보를 그리고 금전적인 도움을 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포털이 지향해야 할 긍정적인 인터넷 문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아시겠지만, 아고라에는 '모금청원'이라는 기능도 있습니다.
지난 번 북한 아동들에게 희망의 분유를 보내자는 모금청원에는 네티즌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금액이 모여 목표금액을 달성하기도 했었는데요.
목표금액을 얼마 안남긴 상황에 한 네티즌이 32만원이라는 거금을 모금해 모금액을 달성하기도 했습니다.

< 북한 아동들을 위한 희망의 분유 보내기에 모인 금액들 >


인터넷은 우리의 생활이 된지 오래고, 이제는 모바일 기기들이 발전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을 접할 수 있는 시기에 우리는 살고 있는데요.
이러한 시기에 웹이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또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 제가 올린 한 트윗에 55개의 RT 그리고 현재는 작성자가 삭제한 듯 하지만(작성자가 부담이 되었는지 혹은 주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는지 해당 게시물이 많이 알려진 후 삭제를 했더군요) 게시물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서 웹에서 다양한 실험이 가능하고 좋은 문화가 형성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웹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고 생각한다. 장애인-비장애인, 여성-남성 등 누구나 똑같이 글을 쓸 수 있고 똑 같이 반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제가 2006년엔가 한 번 한적이 있습니다.

2010년이 다가오는 지금, 그리고 누구나/언제/어디서나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지금. 이러한 긍정적인 문화가 더 많이 퍼져나가고 웹이라는 공간에서 누구나 자신의 광장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서비스들이 나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그 사연의 주인공이신 여학생분이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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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수능일입니다. 저에게는 11살 차이나는 막내동생이 있는데 막내동생의 수능일이어서 그런지 출근하고 뉴스/방송 등에서 수능 관련 소식을 보니 저도 긴장이 되네요.

11살 차이가 나는 막내동생이다 보니 막내가 어린시절 유아원 등을 갈때면 막내를 찾아오거나 하는 일은 자주 저의 일이 되곤 했습니다. 부모님이 모두 가게를 운영하시느라 아침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바쁘셔서 제가 돕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런지 막내동생의 무슨 행사때는 마음이 많이 갑니다.

사실 막내가 고등학교에 진학 할 때 저는 막내에게 말했습니다. "세상엔 공부를 잘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많다. 그리고 교과서를 넘어 더 큰 세상을 볼 줄 아는 현명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굳이 시험성적 몇점에 연연하지 말라고 이야기 했었죠.
당시 저는 대학의 서열화나 수능으로 줄세우기 등의 교육에 비판적 시각이 많았기에 동생은 굳이 공부에만 매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막내동생과 같이 지내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지내다 보니 자주 못보고 지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막내동생이 다니는 고교가 너무 공부를 많이 시킨다고 전학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사실 제가 고교시절일때에도 막내가 진학한 고교가 좀 엄격하다고 소문이 나긴 했었습니다.
고등학교에서는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서명까지 받은 학교였고 야자도 고1은 10시, 고2는 11시, 고3은 12시까지 시키던 학교였으니깐요.
그때 막내동생의 전학이야기를 들었을때 막내의 의지가 매우 확고하여 전학을 한번 알아보긴 했었습니다. 다만, 부모님이 이사계획도 없고 하여 정상적인 전학은 불가능 한 것이었죠. 그래서 제가 직장생활하는 제주에서 막내와 함께 지내며 지낼까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또한 현실상 쉽지않아 동생을 겨우 겨우 설득하여 해당 고교에 계속 다니게 했었습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막내였는데(사실 중학교 시절 축구를 잘하여 축구부 활동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교실에서 18시간 가까운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정말 안쓰럽더군요.
그래서 언제나 명절때나 동생을 보면 한동안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고 공부하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나중에 뉴스등을 보면서 수도권 고교생들의 사교육이나 그런 것들을 보며, 순간적으로 고민도 되더군요. 동생에게 너무 공부만 하지 말라고 말했던 내가 혹시 잘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솔직히 들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연세가 있으시고 가게일에 바쁘시다보니 아무래도 세심하게 동생을 챙기기가 어려운데, 저나 저 바로밑의 동생이야 오래전이니 대부분 환경이 그렇다고 쳐도, 막내동생의 시기에는 그렇지 않음을 알게되니 걱정이 많이 되기도 하더군요.

그래서 수능일인 오늘 막내동생을 생각하니 많이 긴장됩니다. 본인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것 같은데, 노력한만큼만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더 많은 것을 바라면 욕심이겠지요..

그리고 수능이 끝난후 보다 큰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내가 도움을 줘야겠습니다. 책도 많이 읽도록 해서 꼭 좋은 대학을 가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동생이 알았으면 하고, 또 그러한 세상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수능을 보는 모든 수험생들이 자신의 실력을 모두 100% 발휘했으면 하고, 수능이후에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쳤으면 합니다.

Posted by 기동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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